
[전문가 에세이] 시스템 밖의 무력함에 대하여
안녕, 지텔프와 영단어 사이를 뺑뺑이 돌던 중생들아. 오늘은 서예린 선생님이 아니라, 한 아이의 보호자이자 20년 차 개발자로서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오늘 이 글은 누구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야. 다만 우리 삶을 지탱하는 '시스템'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무게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
CASE1
집 근처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수면 내시경이었다. 끝나고 나왔다. 정신이 없었다. 어지러웠다. 수납을 하러 갔다. 계산서를 봤다.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진료 내역을 뽑아달라고 했다. 봤다. 뭔가 추가된 항목이 있었다. 수납 창구에 문의했다.
"이 항목은 뭔가요?"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추가된 것 같습니다." "제가 동의한 적이 없는데, 확인 가능할까요?"
잠깐 확인 후 취소해줬다. 피곤해서 그냥 결제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씁쓸했다. 근데 따지지 않았다. 시스템 오류는 어디서든 생길 수 있었으니까.
CASE2
며칠 뒤였다. 아이를 데리고 동네 안과에 갔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약물을 사용한다고 했다. 근데 그날 검사 항목이 생각보다 많았다. 이상했다. 간호사에게 확인했다.
"이 검사들이 맞는 건가요?" "처방전대로 진행하는 거예요."
담당 의료진에게 재확인을 요청했다. "검사 항목 한 번 더 확인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더 낮은 자세로. 혹시라도 기분 상하실까 봐. 혹시라도 아이 진료에 영향이 갈까 봐.
의료진이 처방전을 다시 확인했다. 백내장 관련 검사였다. 연세 드신 분을 위한 검사였다. 그게 아이 검사 목록에 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눈에서 뭔가 터질 것 같았다.
속은 끓어오르는데, 입은 웃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20년 차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냥 아이 아빠였다."
끓는 속을 참으며 더 조심스럽게 물었다. "죄송한데, 검사 항목이 맞는지 한 번만 더 확인 부탁드려요." 더 조심조심. 더 친절하게.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 시행 전이었다. 바로 수정됐다. 정중한 사과를 받았다. 차분하게 대응했다. 근데 돌아서 나오는데 다리가 풀렸다.
20년 동안 의료 시스템들을 만들었다. 환자 안전을 위해. 오류 방지를 위해. 처방 취소 처리를 했다. 새벽에 당직 서면서 확인했다. 유미 누나한테 전화했다. 엔터 누르기 전에 다섯 번씩 확인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시스템이 더 중요한 거였다. 근데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도, 환자로서는 그냥 환자였다. 20년 동안 내가 만든 시스템들은 이런 실수를 방지하도록 설계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시스템 밖으로 나오니, 나도 그냥 무력한 보호자였다.
20년 차 PM이어도. 의료 현장에서는 그냥 보호자였다. 아빠였다.
참았다. 정말 참았다. 정말정말 참았다. 끓는 속을 참으며 더 친절하게 말하는 게, 화내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지금은 다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다.
이것도 나중엔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직은 모르겠다.
※ 본 글은 의료진이나 의료기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 사람의 실수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그래서 IT 시스템의 이중 확인과 오류 방지 기능이 중요함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 환자 안전을 위한 시스템 개선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건강과 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수리 보이기 싫으면 고개 들어, 아기 고양아... 서예린의 모근 사수 1초 컷 (0) | 2026.05.22 |
|---|---|
| 의료 IT 20년 차, 내 아이를 지킨 실전 상식 (0) | 2026.05.21 |
| 40대 개발자가 퇴근 후 짬짬이 만든 첫 앱, 톡톡스쿼트 이야기 (0) | 2025.12.01 |
| 🏃♀️ 지방 태우기? 면역력 향상?달리기 하나면 OK! (3) | 2025.04.08 |
| “계단 오르기 vs 런닝 vs 등산” 중 다이어트에 가장 효과적인 운동은 뭘까? (3) | 2025.04.07 |